캄보디아 개신교 선교는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1923년부터 1970년까지 C&MA 선교사들이 전적으로 주도하던 시기, 1970년부터 1993년까지 난민캠프를 포함하여 캄보디아의 정치 변혁에 다국적 선교단체들이 참여하던 시기 그리고 1993년부터 지금까지 안정된 정치를 배경으로 캄보디아 교회가 뿌리를 내리는 중에 많은 한국인 선교사가 활동하는 시기 등이다.

1970년은 캄보디아 역사와 캄보디아 교회 역사 그리고 캄보디아 선교 역사 등의 모든 면에서 분기점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친중국, 친공산, 친불교 성향인 시아누크 국왕의 외유를 계기로 친미국, 종교 자유 성향의 론놀이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이싸락이나 크메르루주 등의 민족주의, 보수주의 세력을 봉기하도록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 속에 캄보디아인들은 참된 안정을 추구하였고, 대외 개방 정책으로 캄보디아에 입국한 많은 선교단체는 캄보디아 교회와 더불어 캄보디아 선교 역사를 새롭게 여는 역할을 하였다.


▲ 프놈펜 모니봉 거리에 있었던 베다니교회(1973년)

1972년 2월, SIL(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위클리프(Wycliffe) 성경 번역팀이 캄보디아에 입국하여 캄보디아 소수종족 성경 번역 사역을 시작하였으며, 1973년에는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가 캄보디아 사역을 결정하고 앤드류 웨이(Andrew Way), 던 코맥(Don Cormack), 앤드류 버틀러(Andrew Butler), 앨리스 컴패인(Alice Compain) 선교사 등이 C&MA 및 KEC와 협력하였다. 캄보디아 정치적 영향으로 일시 귀국했던 C&MA의 선교사들도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당시 프놈펜에 26개 정도의 교회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베다니(Bethany), 예루살렘(Jerusalem), 마라나타(Maranatha), 세렙다(Serepta), 호렙(Horeb) 교회 등이 레악 예아(Reak Yea), 손 소네(Son Sonne), 용 솟(Yourng Soth), 신 소움(Sin Soum) 등의 섬김으로 부흥하였고, 특별히 젊은이들이 많이 출석하였다. 땅 치어 목사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KEC 사무총장으로 섬기면서, 캄보디아 교회 재건과 연합에 힘을 썼으며, 땅 치어, 손 소네 목사 등 캄보디아인 교계 지도자 4인은 1974년 여름, 스위스 로잔(Lausanne)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초대되었다.


▲ 따크마으성경학교(1974년)

C&MA 추산으로 1974년 말, 프놈펜에는 1,000명의 기독교 난민을 포함해 약 10,00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으며, C&MA에서는 따크마으성경학교 외에 TEE(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과정을 시작하였다. 특별히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해 TEE 과정을 시작한 것은, 교회가 급성장하고 평신도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되면서 그 필요가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바탐봉에서는 네악 홈(Neak Hom) 목사가 북서부 지역의 마을을 심방하며 태국 국경의 뽀이뻿까지 돌보았고, 시엠립에는 평신도 지도자 3인이 30여 명의 신자를 돌보았고, 깜뽕사옴, 깜뽕톰, 깜뽕짬, 빠일린과 따께오 같은 지방 도시들의 교회 역시 괄목하게 성장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한편으론, 교회가 급성장하고 평신도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되자 교회 행정과 평신도 역할 규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이로 인해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신자가 수천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캄보디아 교회의 부흥은 절정에 이르렀다./장완익 선교사 (캄보디아교회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