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C&MA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로부터 시작된 캄보디아 개신교 선교는 1953년, 캄보디아인 목회자로 구성된 KEC (Khmer Evangelical Church)가 설립됨으로 외국인 선교사와 선교단체가 가졌던 리더십이 캄보디아 교회에 이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의 캄보디아 교회 부흥은 개신교가 캄보디아 민족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길에는 위험과 고난이 뒤따르는데, 캄보디아 교회 역사 가운데 킬링필드 시대는 좁은 문과 좁은 길로 접어든 시기였다.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를 무혈 쿠데타로 장악한 폴폿 (Pol Pot)과 크메르루주 군은 캄보디아 국명을 민주캄뿌찌아 (Democratic Kampuchea)로 개명하고, 지구상 가장 평등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허구를 앞세우며 유례없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모든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고, 모든 형태의 종교가 조직적으로 말살되었다. 특별히 개신교는 외국의 종교라는 명목을 추가하였으며, 약 90%의 기독교 지도자와 신도들이 살해를 당하였다. 이 중에는 폴폿 (Pol Pot)의 정치적 노선에 동의하지 않음으로 순교를 당한 이들도 많았는데, 폴 엘리슨 (Paul Ellison) 선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33명의 KEC 목사와 교회 지도자 가운데 27명이 크메르루주 군에 의해 순교하거나 아사했고, 6명 만이 태국과 베트남으로 탈출함으로 생존하였다.

이 시대, 대표적으로 드러난 캄보디아 교회의 순교 역사는 다음과 같다.

▲ 캄보디아의 순교자 땅치어 목사

1975년 4월 22일, 크메르루주 군이 정권을 잡은 지 불과 5일 만에 크메르루주 군은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는 정권 초기, 정권의 준엄성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적 행위였는데, KEC 사무총장이면서 현역 공군 소령이었던 땅치어 (Taing Chhric) 목사와 동료 민티옌 보안 (Minh Tien Vaun)은 담대히 자신들이 사랑한 크메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장렬히 순교하였다. (땅치어 목사는 현재 프놈펜 새생명교회 (New Life Church)에서 담임 목회하는 땅백후엉 (Taing Vek Huong) 목사의 큰 형이었다.)

땅치어 목사와 함께 1974년, 스위스 로잔대회에 초대되었던 불교 승려 출신의 손소네 (Son Sonne) 목사는 프놈펜에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고, 수백 명의 새 신자를 훈련하며 목양하였다. 그에게는 장래 주님을 섬기려는 네 자녀가 있었는데, 크메르루주 군은 손소네 목사 부부와 네 자녀를 포함한 6명을 총살하였다.


▲ 캄보디아의 순교자 손소네 목사 가족

바탐봉에 사는 초기 기독교인 하임 (Haim)은 학교 교사였는데, 그와 그의 가족들은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쁜 혈통, 영광스러운 혁명의 적 그리고 미국 CIA 첩자로 분류되어 처형되었으며, 깜뽕짬에 사는 쁘라세르 (Prasaer) 목사는 크메르루주 군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당시 따크마으성경학교는 폐교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물론 모든 교회 역시 활동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학교에 머무르거나 교회에 있던 목회자들은 모두 잡혀 죽었는데, 졸업생 40명 중 36명이 이에 해당하였다./장완익 선교사 (캄보디아교회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