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부터 약 10년 동안 캄보디아 교회는 ‘외부 원조’와 ‘자립 교회’ 사이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는데, 교회에서조차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열악한 상황은 그렇다 해도 교인들 스스로 교회를 가난의 해결 대상으로 생각하는 인식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배고파 찾아오는 ‘Rice Christian’의 문제는 빈곤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려웠던 1980년대 동안 뿌리내린 강점과 약점이 1990년대 계속해서 그 결과가 열매로 나타났다. 캄보디아인 기독교인은 결핍과 기근에 의한 압박, 살인 등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현실은 캄보디아 전역에 ‘침묵하는 교회(A Silent Church)’를 만들어냈다. 마치 말라기 성경으로 구약시대가 마감되고,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전까지의 400년을 ‘침묵기’라 부르는 것처럼, 캄보디아 교회도 이때는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1988년의 캄보디아 기독교인들은 교회 건물도 없고, 아무런 권리가 없는 비합법적 집단이었는데, 1988년 7월, 캄보디아 교회는 장례식을 기독교식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1989년 1월경에는 분위기가 현저하게 개선되었는데, 비공식적 승인 아래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청소년 모임과 어린이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주일 예배, 개인적인 복음 전도, 세례, 결혼, 장례 등도 점점 눈에 많이 띄었다. 1989년 6월 18일, 새 정부의 헌법으로 기독교가 더 용납되는 시대가 열리리라는 희망을 안고 캄보디아 교회의 원로들이 모여 ‘임시교회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였지만 각료 회의는 여전히 캄보디아 왕국에 기독교 전파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인도적인 기관이 주는 선물과 다양한 종교 서적 그리고 성경은 받아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1989년, 캄보디아의 교인 수는 전국을 통틀어, 어린이를 포함하여 389명이라는 보수적인 통계가 발표되었다. 이 수치에는 비밀리에 모이는 신자나 약진하던 천주교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1990년 4월 7일, 캄보디아 조국의 재건과 방위를 위한 연합전선 정부는 기독교회(개신교)를 정식으로 인정한다고 발표하였으며, 정당 대통령과 정치 실세였던 치아심(Chia Sim)이 해당 문서에 서명하였는데, 이는 캄보디아 방송국과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다. 마침내 캄보디아 기독교가 공식적인 인가를 받은 것이다.
1990년대 초반, 프놈펜에는 9-10개의 지하 가정 교회가 있었고, 지방에 흩어진 교인들을 다 합쳐도 500명 안 되는 규모였다. 대부분 크메르루주 이전에 C&MA, OMF, CCC 그리고 월드비전(World Vision) 등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일 세대 교인이었다. 이때까지 선교 활동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몇몇 구제단체들(NGO)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들은 구제 사역뿐 아니라 비밀리에 성경 배포 사역도 진행하였다.
유엔을 비롯하여 캄보디아와 연관된 여러 국가가 1989년에 시도했지만 무산되었던 평화조약이 드디어 1991년,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되었으며, 이로 인해 캄보디아는 정치적인 안정과 민주화의 길을 가게 되었다. 10년 넘게 주둔했던 베트남 군대가 철수하고 이미 집권하고 있던 훈센(Hun Sen) 수상 아래, 불교가 국교로 선포되었지만 다른 종교의 자유도 보장되었다./장완익 선교사 (캄보디아교회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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