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이야기] 제14화 전쟁의 후유증과 교회 재건

1975년 4월부터 1979년까지의 짧은 4년 동안, 캄보디아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그로 인해 당시의 인구 700만 명 가운데, 2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1979년은 캄보디아 역사 가운데, 또 하나의 특별한 역사가 시작되는데, 태국에 구성된 난민캠프 그리고 난민을 두고 벌이는 태국과의 갈등 그리고 캄보디아를 해방한(사실은 점령한) 베트남 군대에 의한 통치 등으로 서술된다. ▲ 난민캠프 앞에서의 캄보디아 교회 지도자들 태국 정부는...

[교회사 이야기] 제13화 난민촌에 전해진 빵과 복음

1975년 4월 17일은 캄보디아 역사에서는 물론, 캄보디아 교회 역사에서도 잊지 못할 날이다.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폴폿 (Pol Pot)은 국명을 민주캄뿌찌아 (Democratic Kampuchea)로 개명하였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아닌 국수적 민족주의와 크메르루주 (Khmer Rouge)라는 군부를 배경으로 한 사회주의 정치를 펼쳤다. 캄보디아에 주재하는 외교관을 비롯한 모든 외국인에게 출국 명령을 내렸고, 자국인에게는 도시에 거주할 수 없도록 하였다. 학교,...

[교회사 이야기] 제12화 킬링필드 시대의 캄보디아 교회

1923년, C&MA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로부터 시작된 캄보디아 개신교 선교는 1953년, 캄보디아인 목회자로 구성된 KEC (Khmer Evangelical Church)가 설립됨으로 외국인 선교사와 선교단체가 가졌던 리더십이 캄보디아 교회에 이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의 캄보디아 교회 부흥은 개신교가 캄보디아 민족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길에는 위험과 고난이 뒤따르는데,...

[교회사 이야기] 제11화 1970년대 중반, 캄보디아 선교의 다변화

캄보디아 개신교 선교는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1923년부터 1970년까지 C&MA 선교사들이 전적으로 주도하던 시기, 1970년부터 1993년까지 난민캠프를 포함하여 캄보디아의 정치 변혁에 다국적 선교단체들이 참여하던 시기 그리고 1993년부터 지금까지 안정된 정치를 배경으로 캄보디아 교회가 뿌리를 내리는 중에 많은 한국인 선교사가 활동하는 시기 등이다. 1970년은 캄보디아 역사와 캄보디아 교회 역사 그리고 캄보디아 선교 역사 등의 모든 면에서 분기점이...

[교회사 이야기] 제10화 1970년대 초 캄보디아 교회의 부흥

1960년대, 늦은 비로 표현된 캄보디아 교회의 약진은 1970년대, 엄청난 교회 성장으로 이어졌다. 론놀 정부는 캄보디아를 개방하여 기독교 기관과 관련 개인들의 출입이 가능하게 하였으며,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이 당시 개방 정책을 기회로 캄보디아를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캄보디아는 이미 준전시 상황이었고, 이 시기 캄보디아 교회와 기독교 선교단체들은 수년 전부터 드러난 캄보디아의 역경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교회에 대하여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교회사 이야기] 제9화 캄보디아의 정치적 변혁과 1950~60년대의 교회

캄보디아는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내외적인 정치적 풍랑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격랑의 신호탄은 1965년 5월, 반미노선을 취하던 노르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이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불교사회주의 정책을 앞세워 국가 경제의 주요 부문을 국유화함으로 나타났다. 시하누크 국왕은 1941년, 당시 19세의 나이로 캄보디아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953년 11월에는 프랑스로부터 군사 사법 외교권을 허용받음으로 사실상의 독립을...